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티베트 관계 (문단 편집) == 서남공정 == 동북공정이 한국/북한이나 러시아를 타깃으로 한 것처럼 서남공정은 티베트 역사에 대한 왜곡 이외에도 인도를 겨냥한 점이 없지 않다. 중국 측에서 내외에 티베트를 무조건 시짱이라는 생소한 어휘로 부르도록 우기거나 강요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791533|#1]][[https://m.hankookilbo.com/News/Read/A2023101215070002319|#2]][[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231012/121639320/1|#3]][[https://www.yna.co.kr/view/AKR20231015041200074|#4]] 중국이 [[김치공정]] 과정에서 [[파오차이]]와 김치 용어 혼란 전술을 사용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230210/117825479/2|#]] * '''티베트는 [[원나라]] 때부터 중국 영토였다?''' 티베트는 원나라의 영토가 맞다. 다만 원나라의 몽골족들이 한족들을 학대하고 착취하는 와중에 티베트 불교 승려들을 편애하였고, 이후 들어선 명나라의 [[홍무제]]는 중국 내 남아있던 티베트 불교 승려들을 복수 차원에서 가혹하게 박대하였다. 티베트인들과 티베트 문화는 중화 문명과 달랐다. * '''티베트는 [[명나라]]에게 조공을 바쳤기 때문에 중국의 일부이다?''' 명나라의 외교의 기본은 조공 무역이었다. 같은 논리대로 따지면 명나라에 조공을 바쳤던 몽골, 한국, 일본, 러시아, 포르투갈 등등이 다 중국의 일부라는 궤변이 된다.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도 네덜란드인들이 자신들에게 조공을 바친다고 주장했는데, 같은 논리대로라면 일본 극우들이 과거 네덜란드의 아시아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를 일본 땅이라고 주장해도 중국인들은 할 말이 없다. 중국 명나라는 티베트에 대한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근세 티베트는 명나라보다는 오이라트 연맹의 영향력이 훨씬 더 강한 지역이었다. 명나라에서는 적군의 [[수급#s-2]]을 베어오는 군인들에게 포상을 주었는데 여기서 몽골족 수급은 1급, '''티베트족'''과 여진족 수급은 2급, 남방의 소수민족 및 일본인의 수급은 3급, 명나라 내 농민반란군의 수급은 4급으로 분류하였다. 즉 티베트와 중국 사이의 조공 관계와는 별개로 양 지역 사이에 군사적 충돌이 잦았다는 의미이다.[* 출처 : Soldiers of the Dragon, CHINESE ARMIES 1500 BC–AD 1840 / C.J. Peers 저] 1516년 티베트 부족들이 [[둔황]]을 합병한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그리고 티베트가 명나라의 일부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명나라와 코코노르(오늘날의 [[칭하이성]]) 지역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물쩡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라싸에서는 어느정도 중앙집권이 이루어져 명나라와 외교를 할 정도가 되었지만, 칭하이성의 여러 몽골 및 티베트계 부족들은 [[오이라트]] 연맹이나 [[달라이 라마]]에게 충성하였지 명나라와 별개의 구체적인 외교 관계를 맺지 않았기 때문이다. 칭하이성 일대가 본격적으로 중화 문명에 편입된 시기는 청나라 시대 일이다. [[강희제]] 치세 청나라는 준가르 칸국을 견제하기 위하여 코코노르(오늘날의 [[칭하이성]]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지역을 정복하고 대신 별도의 이번원을 설치한다. 청나라 조정은 달라이 라마들이 코코노르 일대에서 세금을 징수할 권리를 제한하는 대신 매년 보상으로 차 5천 근을 지불해주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강희제 이전에는 칭하이성의 (동쪽 시닝시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은 명나라에서 청나라 초반까지 티베트 달라이 라마들의 직접적인 영향권이었다는 말이 된다. * '''티베트는 중화제국 [[청나라]]의 확고한 영토였으나, 영국 제국주의자들의 [[인도 제국]]의 뒤를 이은 [[인도 공화국]]이 [[시킴]], [[아루나찰프라데시]] 등에서 중국의 신성한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 > 과거의 해석은, 만주족은 중국의 다른 야심찬 이민족 정복자들처럼 그들 지배의 통치나 정당화에 중국식 방법을 적용했고, 그 결과로 사실상 문명화된 중국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청나라의 실상을 제대로 반영했다 보기 힘들다. 청 통치자들은 일인 다역의 역할을 했다. 그들은 여러 부류의 신민들(만주족, 몽골인, 티베트인, 한인)을 동시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다스렸다. 청나라의 황제는 중국 백성에게는 천자였고, [[몽골인]]에게는 칸 중의 칸(대칸)이었으며, [[티베트인]]에게는 차크라바르틴([[전륜성왕]])이었다. '''청나라는 다양하면서도 다민족적인 세계 제국이었다.''' > [[이번원]](理藩院)은 [[만주어]]로 '바깥 지역을 통치하는 기구'를 뜻한다. 이번원은 중국 본토의 외부 지역, 즉 몽골과 티베트 등을 관리하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중화제국 역사상 최초의 행정 기관이었다. 6부와 동등한 지위를 가진 이번원은 수도에 관청을 두고 있었으며, 이번원에 소속된 지방 관료들의 규모도 거대했다. '''한족 지식층은 거의 모두 이번원에서 배제되었고, 대부분은 중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들로 행정이 운용되었다.''' >---- > 하버드 중국사 청 / 윌리엄 T. 로 중국의 티베트 역사 문화 예속화 시도는 티베트 넘어 인접국이자 라이벌인 [[인도]]를 견제하기 위한 포석 수단이다. [[중인전쟁]] 와중에 중국은 [[아크사이친]]의 실질 지배권을 확보한 상황이며, 시킴, 아루나찰프라데시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오늘날의 중국은 청나라 시절 티베트가 폭넓은 자치를 누리고 달라이 라마가 청나라 황제에게 명목상 우대받았다는 사실을 얼버무리며, 해외에 티베트인=중국인이라는 도식을 홍보하는 것이 유리하다. * '''티베트는 중화민국 시절부터 중국 영토였다.''' 청나라 멸망 이후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이 티베트를 점령하기 이전까지 티베트는 사실상 독립 국가를 이룬 상태였으나, 냉정하게 말하자면 [[미승인국]]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티베트가 독립국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나, 몽장조약을 통해 몽골의 인정을 받은 것 이외에는 국제적인 인정을 공식적으로 받지는 못했다. [[중일전쟁]] 당시 장제스가 일본하고 대신 싸워주는 마당에 서구 열강들 입장에서 굳이 장제스가 인정하지 않는 티베트를 굳이 독립국으로 인정해주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을 장악하기 이전 중화민국의 장제스는 극단적인 중화주의자로서 중국 주변에 있는 모든 민족들이 다 한족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프로파간다를 강요하던 사람이었다. 장제스의 정치인으로서의 역량은 보류하더라도, 튀르크어 계통의 위구르어가 사실 중국어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주장부터 시작해서 [[환빠]]에 가까운 황당한 주장을 자주 하던 사람이다. 문제는 오늘날 친중공, 친중국 성향 인사들이 한편으로는 장제스를 무능한 파시스트라고 주장하면서 그 장제스의 주장을 그대로 갖다가 아무 비판도 없이 갖다가 티베트 이슈에 갖다붙인다는 점이다. 티베트와 위구르가 영원한 중화 민족의 영토라고 주장한 장제스는 다른 한편으로 "일제는 피부병이지만 중국 공산당은 심장병이다." "중국이 제국주의에 의해서 망한다면 중국인은 망국의 인간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주의에 의해서 망한다면 중국인은 노예로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라는 과격한 말도 남긴 사람인데, 이런 말을 한 장제스의 의견을 그대로 갖다가 위구르 인권 탄압, 티베트 인권 탄압을 정당화하는 [[중뽕]], [[분청]]들과 [[우마오당]]들은 자신들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는 듯 하다. * '''티베트는 중화인민공화국에 의해 해방되기 이전까지 노예제 사회였다.'''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에서는 기존 인류 역사의 발전을 "[[봉건제#s-6|노예제-봉건제-자본제]]"라는 간단한 도식을 통해 설명해 왔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1950년 이전 티베트의 상황을 미개하고 불평등한 노예제 사회로 묘사했으며 중국 공산당에 의해 해당 지역이 발전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비슷한 주장은 영국이 수단이나 나이지리아와 가나를 식민화할 때 그대로 사용했던 바 있다. 대표적인 제국주의 열강이었던 영국은 효율성 문제로 다른 나라보다 앞선 19세기 초반 노예제를 폐지하였고 이후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서아프리카 나이지리아와 가나에 식민지를 만들 때 "불쌍한 흑인"(...)들에게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고 노예제로부터 이들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명분을 내걸었던 바 있다. 아니 멀리 아프리카까지 갈 필요도 없이 일제강점기 일본 식민사관 역시 한국사를 봉건제를 밟지도 못한 미개한 노예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고 깎아내렸던 바 있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주장은 "티베트인들은 중국의 지배 없이는 노예로 살아야 하는 미개한 민족"이라는 극도로 제국주의적인 관점을 가진 혐오표현으로 악용될 소지가 매우 높다. 일단 전근대 티베트는 개발이 힘든 내륙 산악지역과 지나치게 높은 해발고도 등으로 문명이 발달하기 힘든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이 때문에 티베트에 잔학한 노예제가 시행된 것은 맞다. 그렇다면 중국 공산당이 달라이 라마의 제정일치 노예제 정권 하에서 탄압받던 티베트 인민들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해방시켰는지 살펴보자. '''2010년 통계 기준''' 중국의 성급 및 자치구 중 가장 문맹률이 높은 지역은 티베트 자치구(37.77%)로 나왔으며 그 다음은 역시 티베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칭하이성]]이였다.(10.23%)[[https://en.m.wikipedia.org/wiki/List_of_Chinese_administrative_divisions_by_illiteracy_rate|#]] 이정도는 그나마 양반이고 지역 기준이 아닌 민족 기준으로 한 '''2000년 기준 통계'''로는 문제가 더 심각했는데 조사 시점에서 티베트족의 6세 이상(6세 포함) 전체 인구의 최종학력 비율을 살펴보면, '''미취학자가 45.49%'''로 거의 절반에 달하는 티베트인들이 학교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었으며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 기준으로는 ‘문맹 퇴치반’ 과정 6.07%, 초등학교 과정 35.17%, 중학교 과정 7.72%, 고등학교 과정 1.70%, 중등 전문학교 과정 2.49%, 초급대학 과정 0.95%, 대학 과정 0.38%, 대학원 과정 0.02%이다. 중국 측에서는 중국의 티베트 지배 이후 티베트인들이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고 생활 수준이 대폭 향상되었다고 주장하지만, 해당 주장을 비웃기라도 하듯 한족 및 중국 전체 인구 평균에 비하여 전반적으로 학력수준이 크게 낮았다. '''15세 이상(15세 포함) 인구의 문맹률은 47.55%'''로서, 인구의 약 절반이 문자해독을 못했었다. 이는 중국 전체 인구 평균(9.08%) 및 한족의 문맹률(8.60%)은 물론, 중국 내 전체 소수민족 평균 문맹률(14.54%)보다도 크게 높은 비율이다.[[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324300&categoryId=62055&cid=62055#TABLE_OF_CONTENT5|#]] 소련이 중앙아시아 각지의 문맹을 20년이 채 안되는 기간동안 성공적으로 퇴치한 것과 다르게 2000년 통계 기준으로 중국은 티베트를 50년을 통치하고도 문맹 퇴치에 실패하였다. 기초적인 문해 교육조차 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인민 해방을 운운한다는 자체가 코미디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